예배는 여전히 드리고 있고, 기도는 멈추지 않았고, 말씀도 매일 읽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겁지 않다. 은혜가 느껴지지 않고, 삶에 변화도 감동도 없다.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살아 있는 신앙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문득, 질문이 생긴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신앙생활, 그냥 습관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신앙이 습관이 되는 건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처음엔 작은 무뎌짐으로 시작된다. 예배 시간에 자동적으로 서고, 앉고, 찬양하고, 아멘을 하는 나를 보며 어렴풋이 이상함을 느낀다. 그러나 바쁜 일상 속에서 그 무뎌짐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지나친다. 그러다 보면 신앙은 형식만 남은 종교적 루틴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선 중요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사람은 익숙함에 약하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해온 이들에게 ‘은혜’는 더 이상 신비가 아니라 익숙한 용어가 되고, 예배는 특별한 만남이 아니라 주간 일정 중 하나가 된다. 기도는 습관적으로 입을 여는 시간이 되고, 성경은 정해진 분량을 채우는 독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습관은 신앙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흐릿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감각적인 감동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형식적 신앙을 깨뜨리시기 위해 은혜를 ‘거두시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신다. 더 이상 말씀에서 감동이 없고, 기도에서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교제를 회복하라고 부르시는 사인일 수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며 시작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하박국 1:2). 그 부르짖음에는 습관적 기도가 아닌, 간절함과 정직함이 담겨 있었다. 진짜 신앙은, 늘 느껴지는 신앙이 아니라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경건을 향해 가장 날카로운 경고를 하셨다. 그들은 율법에 익숙했고, 제사에도 철저했으며, 경건한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태복음 15:8)라고 말씀하셨다. 형식은 있는데 중심이 없는 신앙, 열심은 있는데 생명이 빠진 신앙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신앙이 습관이 되는 가장 위험한 이유는, 본인은 여전히 믿음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사람들 앞에서도 여전히 모범적인 신앙인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태도를, 행동이 아니라 방향을 보신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 매일 드리는 기도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나의 마음이 그분을 향하고 있는가?
믿음은 습관으로 유지될 수 없다. 오히려 습관은 은혜를 가리는 필터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 순간 새롭게 그분을 찾기를 원하신다. 신앙이 루틴이 되어가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 그 자체가 은혜의 시작일 수 있다. 하나님은 형식 속에서 무뎌진 마음에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깨지기를 기다리신다.
습관은 일상을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지만, 영혼을 무디게 만드는 독이 되기도 한다. 특히 신앙에 있어 ‘익숙함’은 신비로움과 경외를 흐리게 한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 처음 눈물로 드렸던 기도, 처음 말씀 앞에서 떨리던 마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당연한 일상’이라는 틀 안에 갇혀버린다. 문제는 그 변화를 우리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데 있다.
신앙이 무뎌질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애써 감정을 끌어올리려 애쓴다. 예배 중 억지로 감동을 받으려 노력하고, 말씀을 읽으며 감탄하려 애쓰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더 깊은 공허감만 커진다. 또 다른 반응은 감정의 무뎌짐을 그냥 방치한 채, 신앙 생활을 반복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예배, 기도, 봉사, 묵상이 ‘체크리스트’처럼 바뀌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무뎌진 신앙을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감정은 다시 붙잡는다고 회복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믿음은 감정의 회복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돈할 필요가 있다. “주님, 요즘 제 마음이 너무 무뎌졌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주님을 대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순간이, 회복의 첫걸음이 된다.
신앙의 생명은 ‘살아 있는 대화’에서 나온다. 감동을 느끼지 않아도, 기도 제목이 명확하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도, 예배를 드릴 때도, 매번 새롭게 접근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첫 태도는 간단하다. **“하나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제가 듣겠습니다.”**라는 마음 하나로 충분하다.
무뎌짐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작은 불편함’이다. 늘 앉던 자리 대신 새로운 자리에서 예배를 드려보는 것, 반복하던 성경 본문을 잠시 멈추고 시편처럼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씀으로 나아가보는 것, 기도 제목을 내려놓고 그저 “주님, 오늘 제게 말씀해주세요”라고만 기도해보는 것. 이런 작은 변화들이 무뎌진 믿음의 감각을 서서히 깨우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요한계시록 3:15~16).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신다고 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3:20). 하나님은 무뎌진 마음을 향해 여전히 찾아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다시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신다.
신앙이 습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회복의 시작이다. 이제 남은 건 작은 행동이다. 그동안 익숙했던 패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진심을 담아 다가가는 것이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 자리에서 다시 무릎 꿇고,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마음으로 고백하면 된다. “주님, 저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습관으로 굳어진 신앙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시며, 모든 메마름 위에 새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분이다. 무뎌졌다고 끝이 아니다. 감정이 식었다고 은혜가 떠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내 이름을 부르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내 마음이 다시 깨어나 그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오늘도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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