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움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나다운 삶’, ‘나를 찾는 여행’,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인생의 핵심 가치처럼 이야기된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이 흐름을 부추기고, 소비와 콘텐츠는 ‘나’를 더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쏟아진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라’, ‘너는 너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슬로건은 이제 문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 강력한 자기 긍정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오히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 시대의 자기표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왜 기독교는 이토록 고전적인 가르침을 여전히 붙잡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일까?
‘나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은 각기 다른 재능과 성격을 지닌 독립된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각 사람을 독특하게 디자인하셨다. 문제는 ‘나다움’이 점점 자아숭배의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는 데 있다. 내가 느끼는 것이 진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선이라는 식의 사고는 공동체와 질서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을 고립시킨다. 심리학자들은 SNS와 자기애적 문화의 확산이 청소년의 불안, 우울, 공허함을 오히려 키운다고 말한다. 내 감정에 충실할수록 내가 중심이 되는 세계가 강화되는데, 그 세계는 의외로 너무 작고 너무 불안정하다.
기독교는 인간의 정체성이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된다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없이는 공허하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너희는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자아를 억누르는 일이 아니라, 왜곡된 자아로부터의 해방이다. 내가 만든 나, 혹은 세상이 말하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하신 본래의 나로 회복되는 여정이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의 오해
‘예수님을 닮자’는 말은 종종 도덕적인 교훈이나 착한 사람 되기의 메시지로 왜곡되곤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은 ‘화를 내지 말자’, ‘다정하자’, ‘더 많이 양보하자’ 같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강조되곤 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단지 성품의 개선을 넘어선다. 그것은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2:20)고 고백했다. 이는 내 자아가 완전히 죽고, 예수님의 삶이 내 안에서 재현되는 새로운 정체성의 선언이다. 예수님의 사랑, 순종, 인내, 겸손은 나의 성격이나 의지로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변화로 이루어지는 복음의 결과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자’는 말은 단순한 ‘따라 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나의 옛 자아가 죽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나는 깊은 영적 여정이다. 이는 자기억압이 아니라, 참된 자유로 가는 길이다. 우리가 본래 지어진 모습으로 회복되는 길은 단지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새롭게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점점 더 큰 목소리로 ‘너 자신이 되어라’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라. 그 안에서 진짜 네가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나다움’이라는 말에 이토록 열광하는 걸까? 그 배경에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과 정체성의 혼란이 있다. 이전 세대는 가족, 직장, 종교 같은 틀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부여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율성과 다양성이 강조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정의해야 한다는 부담이 개인에게 전가되었다. 사회는 계속해서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외적 스타일, 취향, 직업, 관계에 몰두한다. 어떤 이는 여행을 통해, 어떤 이는 SNS 콘텐츠를 통해, 또 어떤 이는 자신만의 가치관과 태도로 세상에 ‘나’를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상대적 비교와 불안이다. 다른 사람이 좋아요를 많이 받을수록, 다른 인플루언서가 더 멋진 삶을 사는 것 같을수록, ‘나답게 사는 것’은 점점 허무해진다. 그 결과, ‘나다움’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기준과 눈치를 낳는 틀로 작용하게 된다.
기독교는 이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복음은 “너는 너답게 살아라”가 아니라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내 안의 잠재력이나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죄로 인해 그 형상이 일그러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회복은 자기 발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는 삶의 본질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로워지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는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거나 인정받지 않으셨지만, 진리와 사랑 안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셨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방향을 보여준다. 자기 주장이 아니라 자기 부인의 길, 인기 대신 섬김의 길, 무한 경쟁 대신 십자가를 지는 길. 이 길은 분명히 좁고 낯설지만, 진짜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단지 신앙생활의 이론이 아니라, 일상에서 살아내야 할 실제다. 우리는 SNS 속 타인의 삶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더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이미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정체성은 내가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서 ‘더 나은 나’를 완성하려 애쓰기보다,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고, 그 안에서 ‘나답게’ 사는 가장 복된 길이다.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님 닮기’는 나를 부정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나를 회복하는 길이다. 내가 만든 자아, 타인이 기대하는 자아, 세상이 요구하는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내 정체성을 잃는 일이 아니라, 가장 진실한 나를 찾는 길이다. 세상은 여전히 ‘너 자신이 되어라’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더 근원적인 진리를 제시한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은 위태로운 자기추구와 본질부터 다르다. 그것은 외부에서 정체성을 끌어오는 방식이 아니라, 창조주의 시선 안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여정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다움’은 대개 감정, 성격, 취향 등 일시적이고 조건적인 특성에 머물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깊은 본질을 말한다. 이 본질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회복될 수 있다. 때문에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단순한 인격 수양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로서의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정체성 회복’의 길이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표현은 성경 전반에서 중요한 제자도의 개념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6:24)고 하셨다. 이는 자기 희생이나 억제만을 강조하는 부정적인 명제가 아니다. 오히려 왜곡된 자아,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불안정한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자기 부인은 진정한 자기 발견을 위한 출발점이며, 십자가를 지는 삶은 세상의 기준에 기대지 않는 신앙적 독립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지우는 길이 아니라, 세상이 주지 못하는 생명력을 얻는 길이다.
현대 문화는 자존감을 ‘내가 나를 믿는 힘’으로 정의하지만, 기독교는 자존감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근거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는 삶은 자기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셨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 존재로서, 생명을 공급받고 자라나는 관계적 정체성을 말한다. 우리가 그분과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라는 질문에 가장 안정된 대답을 얻게 된다.
이러한 신앙적 자아 정립은 현실 속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예컨대 경쟁 중심의 직장 문화, 끊임없는 자기 어필을 요구하는 SNS 환경, 외모나 배경으로 평가받는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는 쉽게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말씀과 기도 속에서 길러진 그리스도 중심적 자아는 비교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이 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언은 세상 그 어떤 타이틀보다 강력하다. 이것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특히 Z세대나 밀레니얼 세대처럼 사회로부터 ‘너는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이들에게, 기독교의 정체성 개념은 강력한 대안이 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아를 정립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모델을 함께 세우는 것은 그들에게 정서적, 영적 안정을 제공한다. 실제로 최근의 신앙운동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 따라 살기’, ‘작은 예수 되기’라는 실천적 구호 아래, 이 험한 시대에 살아갈 삶의 기준을 되찾고자 한다.
하지만 이 여정은 고독할 수 있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말은 주변의 동의를 얻기 쉽지만, ‘예수님처럼 살아라’는 말은 오히려 낡은 도덕주의처럼 들리기도 한다. 세상은 자기실현의 성공담을 환호하지만, 기독교는 자기 포기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 간극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다시금 우리를 부른다. 그 길 끝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나’가 아닌 ‘그분’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는 이유는 단순히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거를 삶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세상은 ‘자기를 찾아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 차이가 이 시대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더욱 명확한 빛이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때, 그 삶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정체성의 혼란이 일상화된 시대, 우리는 여전히 고백한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분을 닮아가면서, 진짜 나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나답게’보다 더 큰 소명은 ‘예수님처럼’이라는 진리 속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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