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윤리의 시대에 신자는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한때 ‘상식’이라 불리던 것들이 더 이상 상식이 아니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의 말은 부드러워졌으며, 선언은 화려해졌다. 누구도 상처받아선 안 되고, 누구도 배제되어선 안 되며, 누구의 선택도 틀렸다고 말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 윤리의 표준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윤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사라졌다.

이 시대의 윤리는 방향이 없다. 그저 더 포용적이고, 더 평등하고, 더 자율적이면 충분하다는 흐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윤리’는 시대착오적이라 일컬어지고, 전통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기준은 재해석되고, 정의는 다수의 감정 속에서 부유한다. 우리는 묻는다. 이 모든 변화를 견뎌낸 뒤, 남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 없는 윤리는 결국, 누군가의 감정 위에 세워진 탑일 뿐이다. 타인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것이 윤리의 최종 목표가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설 자리를 잃는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이 불쾌한지가 중요해지고, 무엇이 진실인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성경은 다르게 말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이 구절은 단순히 삶의 위로를 주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혼란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를 결정짓는 선언이다. 윤리는 감정에 의해 흔들릴 수 있지만, 진리는 그 위에 세워진다. 그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세상은 말한다.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신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시대는 변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거룩은 변하지 않는다. 감정은 흐를 수 있지만, 진리는 흐려지지 않는다.

가장 큰 위기는 거부가 아니다. 가장 깊은 위기는, 진리를 ‘해석의 가능성’으로만 다루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시대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말들은 겉으로는 너그러움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기준을 인간의 정서로 덮어버리는 일이다.

교회조차 이 흐름에 조용히 순응하고 있다. 강단에서는 덜 불편한 복음이 선포되고, 회개보다 위로가 먼저이며, 구원은 믿음보다는 포용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회개를 요구하고, 회개는 언제나 기준을 전제한다. 진리가 없다면 회개도, 구원도, 은혜도 무의미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이다. 나를 비추고 시대를 비추며,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거울을 바라보되,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말씀은 여전히 죄를 죄라 말하고, 타락을 경고하며, 구원을 외친다. 하지만 시대는 그것을 불편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지워내려 한다. 윤리를 다시 쓰고, 정의를 새로 정하며, 거룩이라는 단어는 낡은 종교의 언어로 밀어낸다.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말해야 하며, 무엇을 기준 삼아야 하는가? 해답은 단순하다. 말씀이다. 그 말씀이 진리이며, 그 진리만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하지만, 말씀은 ‘하나님만이 옳다’고 말한다. 세상은 ‘정의는 선택’이라 말하지만, 말씀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 선언한다.

신자는 기준 없는 시대에 기준 위에 서야 한다. 흔들리는 윤리, 쏟아지는 새로운 기준들 앞에서, 우리는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그 진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빛으로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박수를 기준 삼아선 안 된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불편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안의 죄를 찌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견디는 자에게만 회개가 가능하며, 회개하는 자만이 은혜를 안다. 복음은 그 은혜로부터 시작한다.

세상은 변하고, 감정은 흔들리고, 시대는 달라지겠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그 말씀 위에, 그 기준 위에 다시 서야 한다. 이것이 신자의 길이며, 교회의 사명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향이다.

진리가 희미해진 세상에서 신자가 감당해야 할 목소리

세상이 말하는 ‘옳음’이란 점점 더 다수가 불편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다수가 불편해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되고, 그 불편함을 야기하는 기준은 반드시 조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이제 진리는 수용성을 따져야 하며, 복음은 환영받을 만한 방식으로 재포장되어야 한다. 더 이상 말씀의 본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부드럽고 유연하게 다가오느냐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복음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복음은 “선을 행하라”는 도덕적 권고가 아니다. 복음은 “너는 죄인이다”라는 선언에서 시작된다. 그 선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복음의 날을 무디게 만들면,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위로의 말만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분은 회개를 선포하셨고, 죄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생애는 죄를 부정하는 시대를 향한 분명한 저항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시대를 따라 진리를 조율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로 시대를 견디는 자여야 한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불편함을 지우려 한다. 그것은 환영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고,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불안 때문이며, 고립되지 않으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환영받는 방식으로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분’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때로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셨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복음은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바로 그 복음을 지켜야 할 사람이다.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선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으로 복음을 말하고, 불편해도 복음을 전하며, 시대의 말보다 말씀의 말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진리의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윤리와 정의, 자유와 관용, 감정과 믿음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교회는 그 한복판에서 스스로 어떤 편에 서고 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 세상과 충돌하더라도 진리를 붙드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다. 세상이 원하는 교회는 ‘말을 아끼는 교회’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말씀을 말하는 교회’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길이다. 그 길은 타인의 인정과 동의 위에 놓인 길이 아니다. 그 길은 때로는 조롱당하고, 거절당하고, 왜곡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만이 생명을 낳는다. 신자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흐름은 끊임없이 절대 기준을 해체한다. ‘모두가 옳다’는 선언은 결국 ‘그 누구도 옳지 않다’는 침묵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음은 여전히 ‘듣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들려줘야 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아도, 들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으며,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검이다. 그 검을 무디게 하지 말라. 그 말씀의 날을 감추지 말라. 말씀은 고요히 내리는 이슬이기도 하지만, 깨어진 심령을 찌르는 창이기도 하다. 지금은 창이 필요한 시대다. 거룩을 잃은 시대에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각성이다. 신자는 말씀의 칼을 들고 서야 한다. 세상이 부드러움을 원할 때,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진리는 더 많은 저항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저항은 복음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다. 복음은 무력하지 않다. 진리는 감정보다 무겁고, 사랑은 진리 안에서만 완전하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진리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우리가 기도하며 다시 서야 할 자리, 그것은 세상의 박수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리다. 진리는 그 자리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세상은 바뀌어도, 복음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말씀 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신다.

진리를 말할 때 우리는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외로움보다 더 큰 축복은 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오늘도 우리는 그 자유를 위해, 진리를 말해야 한다.

매일말씀저널 |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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