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단 하나의 언어로 쓰이지 않았다. 구약은 주로 히브리어로,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신약은 헬라어로 전해진다. 이는 단순한 시대별 언어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계시하시고 보존하신 방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역사적 맥락이다. 성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하나님의 소통 전략이었으며, 언어마다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메시지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각 언어는 특정 시기의 역사, 신앙, 문학, 철학을 반영하며 성경의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히브리어 – 언약의 민족을 위한 거룩한 언어히브리어는 구약의 대다수 책들이 기록된 언어다.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시작해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인 이스라엘과의 소통에 사용되었다. 고대 셈족 언어인 히브리어는 강한 동사 중심의 구조를 가지며, 단어 하나가 복수의 의미를 담고 있어 해석에 깊이를 더한다. 예를 들어 ‘에메트(אֱמֶת)’는 진리, 신실함, 믿음 등으로 번역되며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언어적 자산이 된다.
히브리어는 당시 근동 지역의 일상언어라기보다는, 종교적·제의적 정체성이 강한 언어로 자리 잡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율법을 지키며, 예배를 드리는 데 사용된 언어였기에, 성경의 문장 하나하나는 단어 그 자체에 영성과 신학이 녹아 있다. 특히 시편이나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시적 반복, 병행 구조, 대구법은 히브리어가 갖는 문학성과 예배적 정서를 잘 드러낸다. ‘쉐마 이스라엘(신 6:4)’이라는 유명한 문장은 단어 수는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신학적 깊이는 무궁무진하다.
아람어 – 포로기 이후, 하나님은 일상의 언어로도 말씀하셨다바벨론 포로기를 지나며 유대 사회는 히브리어 사용이 점차 줄고, 아람어가 일상언어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아람어는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링구아 프랑카(공용어)였으며, 상업, 외교, 행정 등 다방면에서 사용되던 언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히브리어는 제사장과 학자들의 언어로 남았고, 일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니엘서 2~7장, 에스라서 4장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구조상 유사하면서도 문법과 어휘에서 좀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특징을 지닌다. 예수님 시대까지도 아람어는 갈릴리와 예루살렘 등 유대 전역에서 널리 쓰였으며, 예수님 역시 일상적인 메시지와 가르침에서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에파타(열려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등은 모두 아람어 표현으로, 신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민중과 가장 가까운 언어로 소통하셨음을 보여준다.
아람어가 성경 속에서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거룩한 언어’에서 ‘일상 언어’로 말씀하신 순간이며, 성전에서만 들리던 율법이 백성의 골목으로 내려온 사건이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계시하셨고, 아람어로 함께 거하셨다. 이 변화는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며, 말씀의 구속력을 민중의 삶에 직접 스며들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헬라어로 가는 길 – 시대가 바뀌고, 언어가 복음의 확산을 준비하다헬레니즘 세계가 도래하면서 유대인은 다시 한 번 언어의 선택지 앞에 섰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헬라어는 지중해 전역의 공통어가 되었고, 이 영향력은 팔레스타인과 유대 공동체 내부로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보다 헬라어에 더 익숙해졌고, 성경을 그들의 이해로 번역하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등장한 것이 ‘70인역(LXX)’이다.
70인역은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최초의 공식 번역본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작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번역본은 단순히 본문의 해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신앙의 유지를 위한 ‘언어적 선교’였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어로 읽는 성경을 통해 공동체성을 지켜냈고, 이는 곧 신약 시대 헬라어 사용의 토대가 된다.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단지 문자의 이동이 아니라 신학적 확장의 시작이었다. 히브리어가 민족의 언어였다면, 헬라어는 세계인의 언어였고, 이것은 곧 복음이 유대인만이 아닌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준비를 마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민족의 경계를 허무는 도구로 ‘언어’를 택하셨고, 복음을 위한 통로로 ‘헬라어’를 준비하셨다.
–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그리고 세 언어가 오늘날 해석에 미치는 영향
신약성경은 철저히 헬라어, 그중에서도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로 기록되었다. 코이네는 고전 헬라어와는 다른 통속어, 즉 대중적 공용어였다. 이는 정치적, 문화적 통합을 추구했던 알렉산더 대왕 이후의 헬레니즘 시대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언어적 결과물이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전역과 유대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코이네 헬라어가 상거래와 정치, 철학, 교육, 심지어 종교 영역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람어가 생활언어로 존재하긴 했지만, 국제적 소통이나 문서 작성의 표준은 헬라어였다.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쓰인 것은, 단순히 시대의 언어를 따른 것이 아니라, 복음이 더 이상 특정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는 하나님의 전략적 결정이었다.
코이네 헬라어 – 복음을 위한 언어적 기초신약성경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는 철학적 고전 헬라어보다 더 간결하고, 문법적으로 단순하며, 서민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언어는 단순한 일상어 이상의 힘을 지녔다. 고전 헬라어가 철학과 논리의 언어였다면, 코이네 헬라어는 마음을 전달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언어였다. 복음서, 바울서신, 사도행전, 요한계시록까지 이 언어로 쓰였다는 것은 복음이 추상적 철학이 아닌, 구체적 관계의 메시지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아람어로 선포되었지만, 그것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전해질 때는 헬라어라는 언어로 옮겨졌다. 이 번역 과정에서 ‘로고스(말씀)’, ‘카리스(은혜)’, ‘아가페(사랑)’와 같은 단어들이 신학적 키워드로 자리잡게 된다. 이들 단어는 헬라어의 철학적 깊이와 신학적 메시지가 결합되어, 단어 하나하나가 교리를 형성하고 신앙의 핵심을 규정하는 용어로 발전했다. 신약성경은 이렇게 헬라어라는 언어를 통해, 복음이 단지 민족적 선포를 넘어서, 세계 보편 진리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 언어의 연결 – 성경의 다언어성은 우연이 아니다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는 각각 전혀 다른 문화, 시대, 사유체계를 지닌 언어들이지만, 하나님은 이 세 언어를 모두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다. 히브리어는 언약의 언어로서 율법과 예배, 역사와 시를 담아냈다. 아람어는 고난과 회복의 언어로서 포로기 유대인의 일상을 품었다. 헬라어는 복음의 확산을 위한 언어로서, 세계 보편을 지향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계시를 한 민족의 언어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으셨고, 시대와 문화를 관통해 가장 효과적인 소통 언어를 선택하셨다. 이는 언어 그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어를 거룩하게 사용하신다는 의미다.
세 언어의 존재는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을 높여줄 뿐 아니라, 복음의 보편성과 초문화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다. 어떤 종교 문서도 세 개의 전혀 다른 언어로 계시가 전개된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성경이 단순한 민족의 신화가 아니라, 인류 보편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보여준다.
현대 성경 해석에서의 언어의 중요성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원어의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히브리어 구약과 헬라어 신약은 각각 특유의 문체, 어법, 어휘를 통해 깊이 있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의 동사 반복 구조’는 행동의 강조를 드러내고, ‘헬라어의 현재완료 시제’는 지속적 의미를 전달한다. 아람어의 언어적 단순함은 오히려 예수님의 감정 표현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교회에서도 원어 성경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보다 깊이 있는 성경 연구가 확산되고 있다. 번역 성경도 중요하지만, 원어의 의미와 배경을 함께 파악할 때 말씀의 의도와 감동은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단어 하나, 시제 하나, 어순 하나가 복음의 핵심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울의 서신에서 ‘의롭다 하심’(디카이오사이, δικαιόω)이라는 단어의 법률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칭의 교리를 오해하게 된다. 이처럼 성경의 언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신학의 기초다.
성경을 원어로 본다는 것은 단지 학문적 태도가 아니라,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고자 하는 믿음의 자세다. 성경의 언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그 시대, 그 문화, 그 문법 안에서 더 정직하게 듣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언어와 현실 속에서 그 뜻을 살아내는 데 큰 힘이 된다.
말씀은 시대를 넘고, 언어를 넘는다성경이 세 개의 언어로 쓰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 시대, 한 민족, 한 언어에 갇히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소통의 경계를 넓혀 가신다. 히브리어는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기록했고, 아람어는 고난의 시간 속 하나님과의 동행을 전했고, 헬라어는 그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이 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의 언어와 역사를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본다. 그리고 이 언어들을 통해, 오늘도 말씀은 들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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