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성경과 기독교를 넘보기 시작했다
GPT와 같은 생성형 AI는 이미 성경을 요약하고 설교문을 작성하며 기도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AI 설교 생성기, 메타버스 예배 공간, 성경 묵상 자동화 앱까지, 이른바 ‘신앙 자동화 시대’가 현실이 되었다. 문제는 이 기술이 ‘복음을 더 잘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넘어, 복음을 대체하려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AI가 작성한 설교를 그대로 강단에서 사용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AI 찬양팀, AI 목사 콘셉트가 실험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신앙생활마저 기계가 대신할 수 있다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기독교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수님이라면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예수님의 관심은 기술이 아닌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 중심의 시대에 등장하셨다. 당시 사람들은 시스템과 규범을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 여겼고, 하나님보다 제도에 더 의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다. 병자, 세리, 이방인, 여인… 그분은 제도를 넘어 사람을 먼저 보셨다.
기독교의 본질은 ‘관계’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복음은 살아 움직인다. AI는 이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정교한 기도문을 생성하더라도, 그 기도가 하나님께 닿는 것은 문장의 완성도가 아니라, 마음의 진정성 때문이다.
복음은 복제될 수 없다
AI가 성경을 암기하고, 설교문을 모방하고, 기도문을 정리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복음의 ‘껍데기’일 뿐이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고, 감동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은 살아있는 말씀, ‘로고스’였다. 로고스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개념이 아니라 영혼을 흔드는 말씀이자, 생명을 낳는 능력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성령의 감동은 복제할 수 없다. AI는 인간의 마음을 알고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마음의 깊은 탄식까지 중보하는 성령의 역할을 흉내 낼 수는 없다. 이것이 AI가 ‘복음을 흉내낼 수 있어도 진짜 복음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예수님은 도구를 도구로 보셨다
예수님은 당시 시대의 도구와 기술을 거부하지 않으셨다. 회당을 방문하셨고, 회복을 위해 물리적 수단도 사용하셨으며, 로마 제국의 행정체계 아래서도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도구에 사람을 종속시키지 않으셨다. 언제나 도구는 복음의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AI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기술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도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거나 대체하게 된다면, 크리스천은 그것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살아계셨다면, AI를 통해 말씀을 더 널리 전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AI에 복음의 전권을 위임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신앙의 분별력’
인공지능 시대의 크리스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분별’이다. AI 설교가 유익할 수 있지만, 그 설교가 성령의 감동 없이 생성된 문장이라면, 그것은 단지 잘 짜인 콘텐츠에 불과하다. 기도문 생성기가 아무리 정교해도,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그것은 영적 소음일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사람들은 그분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물었고, 그분은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그 말씀 이후,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너희는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태복음 6:7)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기술을 활용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정교한 기술’이 ‘깊은 신앙’의 대체물이 되어버리는 일이다.
AI 설교와 성령의 감동은 다르다
AI가 작성한 설교문은 논리적일 수 있다. 감성적으로 뛰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설교가 진짜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그것은 결국, 그 말씀을 준비한 이의 기도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 있다. 성령의 감동 없이 태어난 설교는, 인간이 만든 감탄문일 뿐이다.
예수님은 설교의 기술보다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셨다. 갈릴리 언덕에서의 산상수훈은 마이크도, 스크립트도 없었지만 수천 명을 변화시켰다. 그분은 회당에서 두루마리 성경을 펴고 단 한 구절을 읽으신 후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셨다. 복음은 기술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권위로 선포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대체되지 않는다
AI는 많은 직업을 대체할 것이다. 의사, 변호사, 작가, 번역가, 교사, 그리고 심지어 ‘목회자’까지.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결코 대체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인격적 교제를 원하셨고, 그 교제는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기도란 기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회개란 코드로 입력하는 행동이 아니라, 눈물과 무릎을 통해 나오는 심령의 울림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계처럼 죽지 않으셨다. 그분은 피를 흘리시며, 영혼을 다해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기독교의 본질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실패 대신 죽으신 예수님, 대신 회개할 수 없는 죄인의 선택, 대신 믿어줄 수 없는 복음 앞의 응답. AI는 이 모든 것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진짜로 할 수는 없다.
복음을 위한 기술, 기술을 위한 복음?
문제는 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아니다. AI를 복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시도다. 설교 준비에 참고 자료로 활용하거나, 성경 공부를 위한 요약 자료를 생성하는 등의 활용은 현실적이고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도구가 예배를 대체하고, 말씀을 대신하며, 기도를 형식화한다면, 그것은 기술의 반란이다.
기독교의 위기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중심을 잃을 때 찾아온다. 지금 이 시대의 진짜 위기는 ‘말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빈껍데기가 되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문장을 만들고, 논리적인 설교를 제공해도, 그 안에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정보일 뿐이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물으실까
아마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나와 대화하고 있느냐, 아니면 시스템과 교류하고 있느냐?”
예수님은 늘 사람을 부르셨다. 마태를, 베드로를, 사마리아 여인을, 삭개오를, 니고데모를. AI를 쓰셨을 수도 있지만, 사람을 넘어서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관계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눈을 보고, 손을 만지고, 죄를 묻고, 사랑을 나누셨다.
기독교는 점점 ‘효율’과 ‘편리’라는 세상의 언어에 물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심’과 ‘순종’이라는 복음의 언어로 우리를 부르신다. 기계는 복음을 빠르게 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복음을 깊이 있게 살아낼 수는 없다. 깊이는 기도로부터 나오고, 그 깊음은 주님의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기술의 시대일수록, 본질을 지켜야 한다
AI는 교회를 더 빠르게, 더 똑똑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단 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 무리를 떠나셨고, 한 생명의 구원을 위해 광야를 걸으셨다. 그 사랑은 알고리즘이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다.
기독교는 기술보다 깊고, 기계보다 인격적이며, 데이터보다 더 영원하다. 예수님은 도구보다 영혼을 더 사랑하셨고, 규칙보다 은혜를 더 강조하셨다.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태도는, 빠르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기도일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기계를 잘 다루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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