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산상수훈, 시대를 관통하는 윤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께서 입을 열어 처음 선포하신 이 말씀은, 단지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복이라는 개념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의였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복은 분명하고 구체적이었다. 장수, 자녀의 번창, 부유함, 질병 없는 삶,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징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께서 산 위에 올라 말씀하신 복은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복은 이제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의 존재 방식과 성품으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이 선언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도전이 된다. 산상수훈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며, 세상의 윤리를 뚫고 나오는 하늘의 가치관이다.

팔복(八福)은 총 여덟 가지 복에 대한 선언으로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0절까지 이어진다. 이 팔복은 각각의 선언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순차적으로 연결된 구조를 가진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마지막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게 주어진다. 시작은 가난함이고, 끝은 고난이다. 세상이 기피하는 두 요소 사이에 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마음이 가난하다는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원어적으로 ‘전적으로 파산한 상태’, 즉 스스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의롭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 그런 자가 복되다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 복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데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자, 은혜 아니면 설 수 없음을 아는 자에게 천국이 허락된다는 것이다. 이는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얻고자 했던 유대적 경건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박이었고, 오늘날 자기의 의로 믿음을 구성하려는 현대적 신앙의 왜곡에 대한 해체이기도 하다.

둘째 복은 ‘애통하는 자’에 대한 복이다. 이 또한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죄에 대한 탄식, 세상의 불의에 대한 고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현실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어그러짐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간절히 구하며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이 위로는 감정의 치유를 넘어, 정의가 회복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한다. 이는 고통을 외면하는 신앙이 아니라, 고통을 직면하며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윤리적 신앙을 요청한다.

셋째는 ‘온유한 자’다. 온유함은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리를 절제하는 능력이다. 세상은 강한 자, 말 잘하고 앞서 나가는 자를 선호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 이는 정복이 아니라 양보를 통해 세상을 유산으로 받는다는 패러독스다. 이 온유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이어진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초대는,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에게 가장 간절히 요청되는 본질이다. 교회가 온유함을 잃고 권위와 목소리로 무장했을 때, 복음은 그 순전함을 잃고 만다. 온유는 복음의 전달력을 가능케 하는 통로다.

그다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이는 단지 교리적 정의를 갈망하는 차원이 아니다. 여기서의 의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삶의 전체 방향성을 뜻한다. 곧, 하나님의 정의가 나를 통해, 나의 선택과 말과 행동을 통해 구현되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이 갈망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선택으로 드러난다. 정의롭지 못한 말, 불의에 침묵하는 행동, 진실을 외면하는 습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배부르게 하신다. 그것은 단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게 되는 기쁨과 만족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또 다른 복을 받는다. 긍휼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아픔에 자신을 개입시키는 행위다. 단순히 동정하는 마음이 아니라, 실제로 손을 내밀고 발을 움직이는 자비다. 하나님은 그런 이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이 말은 곧, 자비를 실천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비 아래 거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가 자주 잃어버리는 덕목이 바로 이 긍휼이다. 교리가 날카로울수록, 경건이 형식화될수록, 타인을 향한 긍휼은 쉽게 잊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휼은 단순히 사람을 향한 덕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 행위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여기서 ‘청결함’은 단지 도덕적 순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기가 섞이지 않고, 내면이 단일한 방향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상태다. 이들은 하나님을 본다. 이 약속은 단순히 미래적인 내세의 환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 이 땅에서, 순전한 자는 하나님의 손길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마음이 혼탁한 자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이 복은 단지 평화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자를 뜻한다. 갈등 속에 방관하지 않고, 화해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자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화해의 길을 여셨다. 그분을 따르는 자는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희생을 통해 화해를 일으키는 사명을 부여받는다.

마지막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 대한 것이다. 산상수훈의 복은 여기서 정점을 찍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세상은 환영하지 않는다. 타협하지 않는 정직, 거짓을 거절하는 말, 불의를 지적하는 용기, 그 모든 것은 종종 박해를 불러온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다시 선언하신다. 첫 번째 복과 동일한 결론이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해 고난받는 자 모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산상수훈은 단지 예수님의 교훈이나 이상적인 윤리강령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에게 여전히 유효한 기준이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점점 더 즉각적이고 외적인 형태로 좁아지고 있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은 내면과 존재의 방향에 달려 있다. 이 윤리는 시대를 관통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로마 제국에서도, 종교개혁기 유럽에서도,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다. 산상수훈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제자된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복음의 윤리다.

예수께서 주신 기도, 이른바 ‘주기도문’은 이런 맥락 안에서 주어진 모범이었다. 이 기도는 화려한 수사가 없다. 단어 하나하나가 간결하고, 요청의 중심이 나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 뜻이 먼저 오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용서, 시험에서의 보호는 그 다음에 자리한다. 이 순서는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나의 필요 이전에 하나님의 뜻, 나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통치가 먼저 오도록 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출발이다. 산상수훈은 단지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밝힌다.

예수께서는 금식과 구제의 실천에서도 같은 원리를 강조하셨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은 그 자체로 보상을 다 받는 것이며,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은밀한 것을 보신다는 선언과 연결된다. 세상은 외형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행하는 자를 보시고 갚으신다. 은밀함은 위선의 반대말이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로운 척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산상수훈이 요구하는 윤리는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기준으로 한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보물에 대한 비유를 통해 마음의 방향을 점검하게 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도둑이 구멍을 뚫고 훔쳐 가며, 좀이 먹는 곳에 너희 마음을 두지 말라.” 이 말씀은 단지 물질에 대한 금욕주의가 아니다. 핵심은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것이다. 보물은 곧 마음을 끌고 가는 방향이다.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마음이 매여 있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선언은 매우 급진적이지만, 본질적이다. 현대의 신자에게 가장 깊은 도전이 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의 중심은 여전히 재물에 있고, 의사결정의 기준도, 불안의 원천도 대부분 돈과 관련이 있다면, 예수의 말씀은 그 상태를 이중적이고 분열된 마음이라 진단한다.

또한 예수께서는 염려에 대해 긴 호흡으로 가르치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능적 불안을 겨냥한다. 주님은 그 본능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염려의 방향을 바꾸라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말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의 실제 목표를 바꾸라는 명령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라면, 우리의 염려는 사라지지 않더라도 방향은 바뀐다. 세상의 문제들이 존재하는 한 염려는 계속되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우선하는 삶은 그 모든 염려 위에 다른 질서를 세울 수 있게 한다.

산상수훈은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고, 외식하는 경건을 걷어내며, 진짜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는 권면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윤리적이지만 그보다 깊은 차원의 영성을 요구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그런 종교적 위선을 향한 전면적인 거부였다. 그는 새로운 율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셨다. 그 회복의 윤리는 시대를 초월한다. 당대의 종교적 타락 속에서도, 오늘날의 세속화된 기독교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감상적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요구이며, 신자의 존재 방식을 뿌리부터 흔드는 초청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감춰진 내면을, 말보다 동기를, 경건의 외형보다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를 따지는 말씀이다. 그 윤리를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부인하게 된다. 산상수훈은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처절하게 무너뜨린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복음은 그렇게 우리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신다. 이 윤리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지만, 하늘은 기뻐하는 삶의 방식이다.

매일말씀저널 |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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