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의 역사 – 성경 속 종말 개념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종말’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긴장과 불안을 동반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단순한 세계의 파국이나 무서운 심판의 날로 제한되지 않는다. 성경의 종말론은 인간의 역사, 하나님의 구속 계획, 구원의 완성이라는 더 큰 틀 안에서 전개되며, 파괴보다는 회복과 새 창조를 지향한다. 종말은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최종 무대이자, 영원한 생명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다. 본 글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며 성경에 나타난 종말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오늘날 이 종말론이 신앙생활에 어떤 실질적 영향을 주는지를 고찰한다.

구약의 종말론 –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희망의 전통구약성경에서 종말은 ‘세계의 끝’보다는 ‘하나님의 날’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예언서들,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은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그것을 심판의 날이자 구원의 날로 동시에 묘사한다. 이는 역사 안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날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남은 자를 회복하시는 은혜의 시간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이사야 2장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라”고 경고하지만, 이어지는 장에서는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만방 위에 높아지며 만국이 그리로 몰려올 것”이라는 회복의 환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종말 개념은 시간의 끝이라기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과 정의를 드러내는 결정적 개입의 순간이었다.

다니엘서의 종말론 – 묵시문학의 출현다니엘서는 구약에서 가장 명확한 종말론적 언어와 형식을 보여주는 묵시문학의 대표적 문서다. 다니엘 7~12장은 짐승, 뿔, 천상 법정 등 상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 묘사한다.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속하리라”(단 7:27)는 선언은 세상의 제국들이 아무리 번성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확신을 전한다. 이 묵시문학 전통은 후일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기독교 종말론의 뼈대를 이룬다.

이 시기의 종말론은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 등 이방 권력 아래 고통받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는 절박함과 연결되어 있다. 즉, 종말은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믿음의 근거였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구원이 미래에 완성되리라는 종말론적 시선을 통해, 현재의 고난을 해석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길을 제시했다.

신약의 종말론 –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종말론을 재해석한다. 복음서와 서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른바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종말론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15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다. 이는 종말이 미래의 예언이 아닌, 지금 시작된 현실이라는 선언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종말의 중심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써 종말이 시작되었으며, 그를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말은 더 이상 두려움의 언어가 아니라, 부활 생명과 하나님의 승리가 선포되는 복음의 핵심이 된다. 요한계시록은 이 종말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묘사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완전한 회복을 예언한다. 이로써 성경은 종말을 공포의 날이 아니라, 성도에게는 소망의 날로 정의한다.

성경은 종말에 대해 매우 풍부하면서도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 절정은 요한계시록에 이르러 폭발적인 묵시문학의 형식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성경의 종말론은 단순히 격변과 심판, 무서운 재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완성’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날’을 가리킨다. 종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건강한 종말 신앙은 단지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거룩하게 살아내는 믿음의 자세다.

요한계시록 – 상징 속에 감춰진 궁극의 희망요한계시록은 성경에서 종말에 대한 가장 방대한 묘사를 제공하는 책이다. 겉보기엔 재앙, 짐승, 음녀, 용, 666과 같은 두려운 상징들이 넘치지만, 본질은 승리의 메시지다.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서 “정말 하나님은 통치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에 시달렸다. 요한계시록은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성도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때 승리하게 된다는 복음의 궁극 선언이다.

계시록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7이라는 수는 완전함을,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권세를, 음녀는 거짓된 종교나 탐욕스러운 문명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상징들을 통해 ‘지금의 로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반복될 모든 악의 구조를 겨냥한다. 성도는 이 상징을 해석함으로써 오늘의 세속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종말론의 다양한 해석 – 세대주의, 역사주의, 상징주의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의 종말론은 다양한 해석학적 틀로 설명되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역사주의(Historicism), 미래주의(Futurism), 이상주의(Idealism) 혹은 상징주의 해석이 있다.

세대주의는 계시록을 미래 예언으로 보고, 휴거, 7년 대환난, 적그리스도의 등장, 천년왕국, 최후의 심판이라는 시간표를 따라 사건을 해석한다. 미국의 보수 복음주의 진영에서 널리 퍼진 견해다. 반면 역사주의는 계시록의 예언들이 교회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된다고 본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이 관점을 지지했다. 이상주의는 계시록을 상징으로 해석하며, 그 안의 싸움을 언제나 반복되는 선과 악의 대결로 본다. 각각의 해석은 장단점이 있으며, 현대 신학자들은 어느 하나에 고정되기보다 종합적 관점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종말론의 오용 – 공포 마케팅과 정치적 선동성경적 종말론은 원래 ‘소망’의 메시지였으나, 일부에서는 이를 공포와 음모로 포장하여 선동의 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666이 암시된 바코드가 나왔다”는 식의 주장들은 시대를 불안하게 만들 뿐, 진정한 회개와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1990년대 한국 교회를 충격에 빠뜨린 시한부 종말론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종말 신앙이 왜곡될 때,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포기하거나 현실 도피에 빠지며, 공동체의 책무나 세상의 회복을 등한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으라”, “충성되이 일하라”,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라”고 명령하셨다. 건강한 종말 신앙은 세상의 끝을 말하기 전에, 오늘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게 만든다.

종말 신앙의 본질 –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기종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한다. 이 땅의 악과 고통, 눈물과 죄가 영원히 끝나고,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며 그의 백성과 함께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는 약속은 성도의 희망이다. 그러나 그 날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는 ‘예배하는 삶’이어야 한다.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바라보며, 말씀에 순종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 모든 순간이 종말 신앙의 실천이다.

종말은 종결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되는 날’이며, 이 땅의 역사와 개인의 삶 모두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믿음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종말을 기다리는 학문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내는 신앙의 형태여야 한다.

종말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현대 신앙인의 삶과 마라나타의 신앙 회복

종말론은 단지 미래를 예언하는 신학적 담론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삶의 방향을 재정렬하는 ‘지금의 신앙’을 다룬다. 종말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종말 신앙을 회피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몰입하여 균형을 잃기도 한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종말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어떤 태도로 종말을 ‘기다리며’ 동시에 ‘살아내야’ 하는가?

종말론의 실천 – 기다림은 행동이다예수님은 반복해서 종말을 경고하셨지만, 동시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 “그 종이 주인이 올 때에 깨어 있는 것을 보면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라고 말씀하셨다. 종말은 단지 ‘대기 상태’가 아니라 ‘행동의 준비태세’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는 모두 종말을 대비하는 태도가 실천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 자산을 맡아 충성되이 일하는 청지기 정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자비가 모두 종말을 기다리는 자의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참된 종말 신앙은 ‘언제 오시는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시기 전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신앙적 자문이다. 신학적으로는 이를 ‘윤리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단지 시간표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

교회와 설교에서의 종말 교육 – 회복이 필요한 영역종말론은 오랫동안 교회 설교의 중요한 주제였다. 하지만 현대 교회에서 종말은 점차 설교에서 밀려나고 있다. 지나친 시한부 예언과 음모론적 종말론이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균형 잡힌 종말론은 여전히 필요하다. ‘주님 다시 오심’을 고백하는 신앙은 예배와 윤리, 사회참여와 성경해석 전반에 긴장과 희망을 부여한다.

목회 현장에서는 종말을 실천 윤리, 공동체 영성, 사회 정의, 창조세계 보존 등과 연결 지어 가르쳐야 한다. 종말은 단지 “곧 끝난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땅을 어떻게 돌보고 섬길 것인가”라는 신앙적 과제를 던진다. 설교는 교인을 겁주거나 마비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종말이 복음임을 회복시키는 도구여야 한다. 종말을 소망으로 말하지 못하는 설교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종말 신앙과 사회 정의, 환경, 선교의 연결점종말 신앙은 현실을 포기하게 하는 종교적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게 하는 내적 동력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종말 신앙은 창조 세계에 대한 돌봄, 억압받는 자에 대한 연대, 복음 전파에 대한 헌신을 촉진시킨다.

성경에서 종말은 고통의 끝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장차 올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그 원형을 실현해야 할 비전이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의 비전이라면, 교회는 지금 그 나라의 모형으로 살아야 한다. 종말론은 이 세계의 덧없음을 말하는 동시에,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한 실천을 요청하는 메시지다.

‘마라나타’의 신앙 –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영성초대 교회는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인사를 통해 종말 신앙을 고백했다. 그들에게 종말은 두려움이 아닌 기다림이었고, 무서움이 아닌 위로였다. 고난받는 교회는 종말 신앙 안에서 버틸 힘을 얻었고, 믿음을 끝까지 지킬 용기를 얻었다.

오늘날 교회는 다시 ‘마라나타’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하루하루를 주님의 다시 오심 앞에서 살아간다는 감각, 예배와 말씀, 사랑과 진실, 소망과 고난의 일상에 종말 신앙이 녹아 있어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는 말은 시간표를 묻는 이들에게 보내는 답이 아니라, 성도의 삶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도다.

종말 신앙은 미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사모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태도다. 기다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고, 확신은 마비가 아니라 행동의 원동력이다. 성경의 종말론은 결국 이 질문으로 우리를 부른다. “너는 지금, 종말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

매일말씀저널 | 성경지식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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