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종말론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단어 중 하나가 ‘휴거’다. 많은 이들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끌어올려지는 사건’으로 알고 있지만, 그 개념은 다양한 혼란과 오해 속에 대중적으로 소비되어 왔다. 영화, 소설, 유튜브 채널 등에서도 종말의 공포를 자극하며 휴거를 묘사하지만, 정작 성경이 말하는 휴거의 본질은 명확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휴거는 단순한 종말 시나리오가 아니라, 성경에 뿌리를 둔 신학적 사건이다. 이번 글에서는 휴거의 개념과 성경적 근거, 그 시기와 대상, 그리고 신자에게 주는 실제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살펴본다.
‘휴거’는 한자어로 ‘들 휴(携)’, ‘들 거(擧)’로, 문자 그대로 ‘들림받음’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Rapture’로 번역되며, 이는 라틴어 ‘rapturo(끌어올리다)’에서 유래했다. 성경에는 ‘휴거’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 개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여기서 ‘끌어올려’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하르파조(harpazō)’인데, 이는 ‘강하게 붙잡아 끌어올리다’라는 뜻을 가진다. 바로 이 단어가 라틴어 성경에서 ‘rapturo’로 번역되며, 휴거(Rapture)라는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휴거는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성도들과 먼저 부활한 자들이 동시에 공중으로 들림을 받는 사건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단순히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약속된 구속의 완성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그날이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고 말한다(고린도전서 15:52). 이는 갑작스럽고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간의 예측이나 대비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휴거는 ‘심판의 날’이자 동시에 ‘구원의 날’이다. 신자들에게는 기다림의 절정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이 된다.
그렇다면 휴거는 ‘언제’ 일어나는가?
이 부분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전천년설에서는 예수님의 지상 재림 전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보며, 대환난 전에 휴거가 있다는 ‘환난전 휴거설’, 대환난 중간이나 후반에 일어난다는 ‘환난중 휴거설’, 그리고 대환난 이후 재림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환난후 휴거설’이 있다. 이 견해들은 모두 성경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하며, 정확한 시점은 하나님만 아신다(마태복음 24:36). 예수님조차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라고 하셨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휴거의 시점을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대비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휴거의 대상은 누구인가?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그리고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교회 출석 여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거듭난 자들,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는 이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등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이 준비되지 않은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는 순간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는 단지 종교적 외형이나 신앙적 습관이 아닌, 실제적인 회개와 성령의 인침이 있는 삶이 구원의 기준이 됨을 보여준다.
성경은 휴거가 세상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줄 사건임을 암시한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한 집에서 둘이 자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기록된다. 마태복음 24장도 동일한 구조로,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한다. 이는 휴거가 ‘공개적이며 구별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휴거는 단순히 종말의 한 장면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가르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를 기다리시지만,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기회의 문은 열려 있지 않다.
오늘날 교회는 휴거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이유는 ‘공포심 조장’이라는 비판 때문이기도 하고, ‘예언 실패’에 대한 역사적 상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휴거를 두려워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들에게는 “위로하라”고 말한다(살전 4: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휴거는 준비된 이들에게는 가장 큰 소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곧 휴거의 장면이다. 믿는 자는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는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빌립보서 3:20), 그분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이 약속이 신자의 모든 고난과 기다림의 의미가 된다.
휴거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의인들을 먼저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자비이다.
노아의 방주처럼, 롯의 도피처럼,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이 닥치기 전에 구원받을 자들을 먼저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그러나 그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휴거 이후 더 큰 심판의 시간이 남아 있다. 요한계시록은 그 날을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이라 부른다. 따라서 지금은 은혜의 날이며, 휴거는 그 은혜의 문이 닫히는 시점이다.
신자는 이 휴거의 진리를 묵상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여러 번 명령하신다. 이는 단지 육체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긴장하며 시대를 분별하라는 뜻이다. 매일의 삶을 회개로 채우고, 말씀으로 무장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만이 그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다. 휴거는 두려움의 사건이 아니라, 소망의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날, 신자는 눈물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질 것이다.
작성자: 이시온 | 매일말씀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