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장 26절은 예수님께서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선포하신 말씀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크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더 많은 권력,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영향력, 더 넓은 존경… 그러나 예수님은 그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시되, 그 욕망을 이루는 방법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신다. 세상은 권력과 지배를 통해 크고자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김과 낮아짐을 통해 참된 위대함에 이른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있었던 사건 중에 주어졌다. 그 여정의 마지막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바로 그 순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등장하여, 예수님의 영광 중에 두 아들이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단순한 자리 욕심 이상의 것이었다. 당시 메시아 사상은 정치적 왕국 회복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적 성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다른 제자들도 분노하고 시기하며 갈등이 발생한다. 그때 예수님은 모든 제자를 불러 이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은 단지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리더십 원칙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다.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과 하늘의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하신다. 세상의 큰 자는 위에 서려 하고, 명령하고, 대접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신다. “가장 큰 자가 되려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 가장 위대한 자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 이것은 가치의 전복이다. 그러나 동시에, 진짜 리더십의 회복이다.
‘섬기는 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이다. 이는 단순히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낮은 자리에 임하여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자를 의미한다. 초대교회에서 집사(Deacon)라는 직분도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즉, 참된 위대함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낮은 자리에서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선언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와 신앙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현대 사회는 성취 중심, 경쟁 중심의 문화 속에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사역의 크기’, ‘모임의 규모’, ‘이름의 인지도’가 은연중에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가장 많이 섬기는 사람이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리더이든, 신자이든,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김이 곧 영향력이다. 그리고 그 섬김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빛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는 중보자, 조용히 교회를 청소하는 손, 연약한 성도를 위로하는 말 한마디… 그런 섬김이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된다.
이 말씀은 또한 자아 중심적 사고에 갇혀 있는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도전이 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기 중심적 기준으로 위대함을 정의한다. 내 이름이 얼마나 알려졌는가, 얼마나 대접받는가, 얼마나 주목받는가를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한다면, 먼저 남을 섬겨라.” 이것은 사회적 반전이며, 영적 성숙의 척도다. 내가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면, 나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자이다.
또한 이 구절은 청년들에게 삶의 방향을 재정의하도록 도와준다. 청년기는 영향력, 성장, 인정욕구가 극대화되는 시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갈망을 무조건 억제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거룩하게 다듬고, 하늘의 원리로 바꾸라고 하신다. “크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오늘, 가장 낮은 자를 섬겨라. 너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먼저 돌아보라. 이름 없이 헌신해라. 그러면 너는 하늘에서 가장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 방향의 원리다.
이 말씀은 또한 가정, 직장, 공동체 내의 인간관계를 새롭게 회복시킨다. 대부분의 갈등은 ‘서로 섬기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부부가 서로 섬기기보다 대접받기를 원할 때 갈등이 생기고, 상사와 부하 직원이 지배하려 할 때 긴장이 생기며, 교회 안에서 봉사가 ‘명예직’이 될 때 다툼이 생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분명히 말한다. 섬김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다. 진심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은 관계의 평화를 가져오고, 공동체를 세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 말씀을 가르치신 것에 그치지 않으셨다. 그분은 친히 본을 보이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태복음 20:28).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섬김이었고, 십자가는 그 섬김의 정점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 길을 따라야 한다. 더 크고자 한다면, 더 낮아지자. 더 높아지고 싶다면, 더 깊이 섬기자.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길이며, 예수님의 방식이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다시 세워보자. 나는 어떤 크기를 추구하고 있는가? 내가 진정 위대해지길 바란다면, 오늘 내가 누구를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를 점검하자. 그리고 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길을 걷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참된 크기와 영광을 허락하실 것이다.
매일말씀저널 | 성경 한 절
(말씀 출처: 마태복음 20장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