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무례했던 날들 – 회개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신앙생활을 하며 가장 마음 아픈 깨달음은, 내가 모르는 사이 하나님께 무례했던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무례는 반드시 언성이 높아야 하거나 신성을 모독하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무례는 때때로 하나님을 내 삶의 도우미로만 취급하는 무의식 속에서 시작된다.

“왜 아직도 응답하지 않으시지?”,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왜 이런 결과야?”, “주님, 이것밖에 안 되세요?” — 믿음을 가장한 불평, 신뢰를 빙자한 실망의 감정은 결국 하나님을 나의 시간표에 종속시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말은 ‘주님의 뜻대로’라 하면서도, 마음은 철저히 ‘내 뜻대로’를 고집한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례한 자가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듣는다. 그러나 그 사랑을 ‘익숙함’으로 둔갑시킬 때 우리는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며, 당연하게 여기며, 요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대하는 순간, 무례는 시작된다.

신앙의 태도가 무례로 기울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 무례해질 수 있는 건, 대부분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해졌다고 착각할 때 생긴다. 하지만 친밀함과 경외심은 서로 배제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친구처럼 지내셨지만, 그분의 하나님 되심 앞에서는 늘 무릎을 꿇게 하셨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그건 연약함일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포기일 수도 있다. “왜 나는 이렇게밖에 안 되는 걸까”라는 자책이 지나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지 않으셨다”는 판단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그것이 곧 무례함이다.

그 무례함은 종종 은혜 속에 숨어 있다. ‘주님이 이해하실 거야’,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니까’라는 말로 포장된, 회개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깊이 겸손해질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분은 겉으로 드리는 말보다, 그 말의 중심에 있는 자세를 보신다.

회개는 기억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기억하고, 내가 얼마나 그분의 은혜를 함부로 다뤘는지를 떠올릴 때, 그제야 회개가 시작된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살다가 돈이 다 떨어졌을 때 비로소 말한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회개는 그 순간 시작되었다. 돌아가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다시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회개도 그렇다. 어떤 특별한 사건보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의 전환이 먼저다. 그분을 다시 ‘주님’이라 부르는 것, 그분을 다시 ‘두려워할 대상’으로 존중하는 것, 그 순간 회개는 시작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말들, 태도들, 생각들이 천천히 떠오를 때, 그제야 우리는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회개는 ‘돌아감’이자 동시에 새로운 출발이 된다.

회개는 눈물로 끝나지 않는다. 진짜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 방향을 틀 때, 비로소 회개는 완성된다. 그러니 회개는 단지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중심에 두는 삶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빠르지만, 회개는 천천히 온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까지 오래 기다리시지 않지만, 우리는 회개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무례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다는 걸, 기도는 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다윗이 그랬다. 그는 밧세바 사건 이후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죄를 지적받을 때까지 침묵했다. 그러나 시편 51편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무너졌다. 그것이 진짜 회개의 출발이다.

우리의 무례함은 종종 침묵 속에 감춰진다

하나님께 무례했던 말들은 소리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종종 우리는 침묵으로도 무례를 범한다. 하나님이 감동 주실 때 외면했던 침묵, 하나님이 기다리실 때 고의로 반응하지 않았던 침묵, 하나님이 회복의 기회를 주실 때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침묵. 이 모든 침묵은 하나님을 향한 의도적인 외면일 수 있다.

회개는 단지 죄의 목록을 읊는 것이 아니라, 그런 침묵까지도 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두드리셨던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말씀이 내 마음을 건드렸을 때, 나는 왜 그 감동을 덮어버렸는가? 회개는 이런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님 앞에 꺼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 그때 제가 무례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너무 쉽게 다뤘습니다.”

회개의 깊이는 사랑을 이해한 깊이와 비례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회개도 깊어진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게 될수록, 내가 얼마나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깨닫게 된다. 회개는 죄책감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진짜 회개는 사랑 앞에서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말에 짜증을 냈다가 나중에 눈물 흘리며 사과했던 경험이 있다면 안다. 그 사과가 단지 잘못했다는 후회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도 그렇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 앞에 너무 작아지는 자신을 보는 것. 그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이 가장 진실한 회개의 눈물이다.

회개 이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순종이 따라야 한다

눈물의 회개가 아무리 진실해도, 삶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반쪽 회개다. 진짜 회개는 다음 선택에서 드러난다. 이전과는 다른 길, 이전과는 다른 자세, 이전과는 다른 태도. 회개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도구처럼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

신앙생활의 회복은 감정의 회복이 아니라 중심의 회복이다. 기도의 내용이 바뀌고, 감사의 이유가 달라지고, 예배의 태도가 달라진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 이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께 무례했던 날들, 그 기억이 아프고 부끄러워도 괜찮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회개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우리를 두 팔 벌려 기다리신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미리 보고 달려가 입을 맞추셨다. 그것이 회개의 끝이자, 은혜의 시작이다.

매일말씀저널 | 신앙칼럼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HP Code Snippets Powered By : XYZScripts.com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