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세요.”
우리는 이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는 말씀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제 삶에서 상처를 준 사람 앞에 서게 되면, 마음은 말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상처는 깊고 오래 남아 있는데, 그를 향한 용서의 마음은 매번 벽에 부딪힌다. 그렇게 우리는 말한다. “용서하고 싶어요. 하지만 정말 어렵습니다.”
신앙 안에서 용서란, 단지 선한 행위의 차원을 넘어선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며, 동시에 그분의 은혜를 내 삶 안에서 실현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의지로만 되는 일이 아니다. 상처는 고통을 수반하고, 상처의 기억은 반복적으로 나를 자극한다. 머리로는 용서를 선택해도, 가슴은 계속해서 분노와 서운함을 되새긴다. 그래서 신앙인의 용서는 언제나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씨름하는 주제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더 깊다. 사랑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 혹은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받은 배신과 무시는 단지 감정적인 충격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존감을 흔들고, 신뢰 자체를 붕괴시키며, 하나님께조차 묻고 싶게 만든다. “하나님, 이런 사람까지 제가 품어야 합니까?” “왜 이런 사람을 제 삶에 두셨습니까?”
용서를 명령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은 무서운 구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도 ‘용서해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간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핵심은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함’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조 안에서 살기를 바라신다. 용서는 신앙인의 본질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신앙 고백의 실제적 결과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이유는,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끊임없이 실수하고, 상처 주고, 하나님을 떠나려 할 때조차 그분은 사랑으로 품으셨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무른다면, 우리도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용서는 그 사랑의 순환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덜 받은 사람일까?” 아니다. 용서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그만큼 받은 상처가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의 부족함이 아니라, 아직 아물지 않은 아픔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를 억지로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용서를 향한 몸부림, 그 자체를 귀하게 보신다.
용서는 단회적인 결심이 아니라, 과정이다
용서는 오늘 한 번 결심했다고 내일 완전히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상처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성경은 ‘용서하라’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는 표현은 반복적으로, 의도적으로, 신앙의 결단으로 용서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주님, 저는 아직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기도는 절망이 아니라, 진짜 회복이 시작되는 자리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직함 속에서 일하시고, 회피하지 않은 진심 속에서 치유를 시작하신다.
또한, 용서는 가해자를 무조건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짜 용서는 상처와 마주하면서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내 안의 복수심과 억울함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길은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다. 내가 그를 미워하는 동안, 그는 내 삶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나 용서를 통해 그 고리를 끊을 때, 나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요청하신 이유다. 회복은 상대방이 아닌, 나의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용서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 사람이 지금도 아무런 사과 없이 잘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이 아직도 나에게 뻔뻔하게 말하고 다닌다면,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억울하게 느껴진다. 피해자는 아직도 아프고, 여전히 그 일로 잠을 설치는데, 가해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간다. 그런 현실에서 “용서하라”는 명령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성경은 여전히 말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
하나님은 용서를 통해 단순히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데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그 기도는, 완전한 의로움과 완전한 사랑이 만난 자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기도는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그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보통 용서를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 상처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분노와 억울함은 내 일상을 잠식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벽을 만든다. 용서를 선택할 때, 나는 나의 복수심과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비로소 자유를 경험한다.
물론 이 자유는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느리게 반응하고, 오래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감정이 아니라 ‘결단’으로 시작해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합니다. 감정은 아직 따라오지 않지만, 하나님, 이 결단을 받아주세요.” 이 고백이 바로 은혜로 시작하는 용서의 출발점이다.
용서는 하나님께 나의 권리를 맡기는 일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손해 봤다’는 생각 때문이다.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인 내가 왜 또 참아야 하냐는 항의가 생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을 포기하지 않으셨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균형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역시 ‘정의’를 주장하기 전에, 하나님께 그 정의를 맡겨야 한다.
로마서 12장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복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내 영혼을 정결하게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억울함을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 언젠가 반드시 모든 것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 믿음이 있다면, 나는 지금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용서는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아직 용서가 안 됩니다.” 이 말은 연약함의 고백이지 신앙의 실패가 아니다. 진짜 신앙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 다시 이렇게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주님, 오늘 하루 이 사람에 대한 분노보다 당신의 은혜를 더 의식하며 살게 해주세요.” 이 기도는 우리 마음속에서 조금씩 벽을 허물고, 얽혀 있던 상처의 매듭을 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도 눈물이 나지 않고, 다시 마주쳐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날이 온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용서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되는 것임을.
신앙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도록 맡기는 삶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제 감정이 따라오지 않지만, 제 믿음은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 한 줄이면 충분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그 중심이 깨어지기까지 인내하신다. 그리고 그 깨진 마음 위에 은혜의 회복을 시작하신다.
결국 용서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정직해지는 나의 믿음의 표현이다. 억지로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완전히 잊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더 이상 그 상처가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하고, 그 사람의 그림자가 내 예배를 흐리지 않게 하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용서가, 나를 자유케 하는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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