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겉으로는 평등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는 분명했던 가치와 기준들이 이제는 구시대의 잔재로 치부되며, 절대적인 진리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성별의 경계는 해체되고, 가족의 형태는 다변화되며, 인간과 기계의 구분조차 흐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다움’을 추구한다며 정체성과 생물학적 본질까지도 해석의 문제로 돌리고, 사회는 이런 흐름을 포용이자 진보라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세상, 각자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혼란의 시대가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 성경은 이런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혼돈은 창조의 방식이 아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는 명령으로 시작된다. 어둠과 혼돈 속에 질서가 세워지고, 경계가 나뉘고, 이름이 주어진다. 하늘과 땅, 물과 육지, 낮과 밤이 구별되고, 각 생명체는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경계를 두셨고, 그 경계 안에서 생명이 자라도록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자유라 말한다.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는 논리 앞에 상대화되고, 혼인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가정의 개념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취급된다. 그 모든 흐름이 결국은 창조의 질서와 충돌한다.
하나님은 나뉘고 구별된 것들을 보시며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의 세계는 ‘모두 섞이고 열려야 한다’는 흐름을 미화하며, 모든 절대적 경계는 억압이라 주장한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기준이 사라진 시대의 특징은 결국 ‘자기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개인의 감정이 곧 진리가 된다.
문제는 그런 상대주의가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더 이상 진리를 말할 수 없고, 절대 기준을 주장하면 혐오가 되고, 경계를 말하면 배제의 상징이 된다. 진리는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진리가 사람을 공격하는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신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
신자는 세상의 질서가 바뀌어도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진리는 상대적 견해가 아니라 인격이고,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며, 성경 안에 계시된 영원한 원칙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며, 문화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말씀 위에 삶을 세워야 한다. 세상이 기준을 내려놓을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욱 말씀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창조의 질서를 가르치고, 교회 안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회복하며,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순종을 훈련해야 한다.
진리를 기준 삼는 삶은 세상에서 고립되거나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더 깊은 자유와 분별력을 갖게 하는 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시대는 신자들에게 분별력을 요구한다. 단순히 무엇이 맞고 틀리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으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그 창조의 구조는 여전히 옳고 선하며, 오늘 우리도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작성자: 이시온 | 매일말씀저널